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계 한국인 (문단 편집) == 역사 == [[대한민국]]의 러시아인 공동체는 [[일제강점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러시아 내전]]의 결과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부 백군 난민들이 조선에 정착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으로 약 9,000여 명의 백군 난민들이 이주하였는데 이는 당시 일본이 소련을 적대하고 적백내전 당시 백군을 지원하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렇다고 일본에서 이들을 제대로 챙겨준 것은 아니어서 원산 내 난민 수용소에서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의 질병으로 죽어나가는 등 참상이 나오기도 했다.[[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742963|#]] 이들 중 상당수는 다시 미국이나 호주 등지로 흩어졌지만 일부는 당시 조선 땅에 그대로 남아 생활하였다. 영화배우 [[율 브리너]]와 그의 가족도 이때 잠시 함경도에서 살았다가 미국으로 이민갔다. > 한반도에 남아 일생을 보낸 러시아 난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바로 유리 양코프스키[* [[폴란드계 러시아인]]이다.] 가족일 것이다. 1922년 늦가을 유리 양코프스키와 그의 가족 일행은 다른 백계 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볼셰비키]]를 피해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유리 양코프스키 가족의 피난생활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크게 변했다. 1925년 여름 양코프스키 가족은 청진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역 부근 온포지역에 한 일본인 온천장 주인에게 아끼던 자동차마저 팔아야만 했다. 감사의 표시로 온천장의 일본인 주인이 양코프스키 가족을 자신의 휴양소로 초대했다. 이날 밤 일행은 등나무 넝쿨로 감겨 있는 작지만 "낙원 같은" 오두막집에서 보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주변 환경에 반한 양코프스키는 인근에 있는 한 한국인이 소유한 집을 여름동안 임대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후에 가까운 친척이자 영화배우 [[율 브리너]]의 아버지인 보리스 브리너로부터 돈을 빌려 가옥과 대지를 구입했다. > > 양코프스키 가족들은 점차 주변 농경지, 과수원, 삼림의 주인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제 강점기 한반도의 대표적 러시아촌인 노비나가 탄생하게 되었다. 노비나는 원래 양코프스키 가문의 문장에 그려진 단검을 의미하는데, 이제는 한국과 일본은 물론 만주, 중국, 유럽과 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휴양지가 되었다. 1928년 여름부터 상하이와 하얼빈의 부유한 백계 러시아인들이 양코프스키로부터 주변 대지들을 구입해 별장을 신축하면서, 노비나는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유리 양코프스키는 노비나에서 남쪽으로 약 18킬로미터 떨어진 함경북도 경성군 염분리 용현리 섬골산 기슭에 새로운 별장지대를 조성했다. 그리고 이 지역을 [[푸시킨]]이 지은 시를 인용해 루코모리예로 불렀다. 해안가에 위치한 루코모리예는 노비나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6킬로미터에 이르는 벨벳과 같은 부드러운 황금모래가 해안가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모래사장 바로 옆에는 아름다운 해송이 병풍처럼 펼쳐있었다.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반한 부유한 백계러시아인들이 유리로부터 대지를 구입해 이 지역에도 별장을 지었다. 이들 가운데는 보리스 브리너도 있었다. > > 나라를 잃은 백계러시아인들에게 루코모리예는 지상낙원과 같았다. 루코모리예의 여름철 바닷물은 따스하고 파도도 적어 수영하기에 적합했다. 휴양객들은 아침에는 주로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고 오후가 되면 주변 지역을 관광했다. 루코모리예 해안가 남쪽 낮은 언덕 기슭에는 전형적인 어촌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어부들이 잡은 정어리를 모래사장에 펼쳐 말리곤 했다. 백계러시아인들은 뱃사장에 누워 바닷바람이 뿌리는 매캐한 냄새에 취하곤 했다. 간혹 주변 어촌에서 아름다운 한국 여인들이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가져오는 새우나 게 등을 사서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수영 후 이들이 주변 마을을 지나가노라면 어린 아이들이집에서 뛰쳐나와 “야오시키, 야오시키”하며 외쳐 되었다. 한국아이들에게 서양인들은 모두 양코프스키처럼 보인 것이다. 하얼빈과 상하이에 거주하는 백계러시아인들은 물론 일본인들도 노비나를 방문했다. 이들 중에는 소기 조선총독도 있었다. 그러나 양코프스키 일가가 누구보다도 우정을 느끼고 인간적인 감정을 느낀 사람들은 바로 한국인들이었다. 양코프스키 가족들이 접촉한 한국인들은 도시의 관료나 사업가와 같은 세련되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이 아니라 마을의 보통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냥꾼들이었다. 양코프스키 가족들은 사냥을 나가면 한국인들과 함께 [[김치]]를 먹고 초가집에서 잠을 자며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함경산맥의 깊고 험준한 산 속에서 숙련된 한국인 사냥꾼들은 양코프스키 가족에게 친 형제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유리의 장남 발레리 양코프스키는 이들을 아르세니에프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한국의 데르수 우잘라로 부르기도 했다. 이외에도 휴양객들은 아마추어 배우가 되어 연극을 무대에 올리곤 했다. 보리스 브리너의 두 번째 부인인 예카테리나는 러시아의 유명한 배우로 노비나에 살면서 아마추어 연극을 연출하고 제작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584130|출처 : 식민지 시대 러시아인 양코프스키 일가의 한반도 정착기록(KCI 등재논문)]] 이후 2차대전 말 [[8월의 폭풍작전]]에서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에 진주하는 과정에서 함경도에 살던 백군 난민들은 소련으로 송환되었고 서울에 남아있던 러시아인들 역시 6.25 전쟁 과정에서 북한군에 의해 다시 소련으로 압송되면서 한국 내 러시아인 거주 역사는 단절을 겪는다. > 1946년 9월 소련군이 노비나에 들어와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하면서, 20여년의 노비나 역사는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46년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로 유배된 유리는 1956년 병과 가난으로 고통 속에 죽었다. 그의 다섯자녀들의 운명도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크게 바뀌었다. 남한과 미국 등 자유세계로 탈출한 빅토리아나 아르세니는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탈출하지 못하고 공산세계에 남아 있던 발레리는 차디 찬 [[추코트카]]의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발레리는 짜르의 전제정치, 일제의 식민통치 그리고 공산정권 등 20세기의 다양한 정치체제를 모두 경험한 인물이었다. 2010년 4월 17일 발레리는 9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발레리는 한반도에서지낸 기간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584130|출처 : 식민지 시대 러시아인 양코프스키 일가의 한반도 정착기록(KCI 등재논문)]] '''한 때 단절된 러시아계 한국인의 역사는 소련 해체를 전후로 다시 시작되었다.''' 1990년 한소수교 이후, 러시아인 보따리 상인들이 부산항에 드나들게 됐다. 얼마 안 가 [[소련 해체]]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이 다시 대한민국에 터를 잡고, 다른 한편으로 [[사할린 한인]]이나 [[고려인]]들이 한국으로 귀화하기 시작했다. [[https://gsis.kwdi.re.kr/statHtml/statHtml.do?orgId=338&tblId=DT_1BC0510N|2021년 외국인주민자녀 현황]] 통계에서 재한 러시아인들의 자녀 인구는 1,289명으로 나왔으며, 이는 한국계[* 통계 자료 링크 상으로는 정확한 설명은 없지만 고려인을 언급한 것으로 추정] 자녀 176명을 제외한 수치라고 한다. 재한 러시아인들의 미성년 자녀들 중 부모가 사립 국제학교를 다닐 정도로 부유한 사람들은 대사관 직원 등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여타 한국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일반 한국 학교를 다닌다. [youtube(ySTl1sp7ejk)] * [[https://www.fmkorea.com/3654842705|박격포 분대장 임하은 병장 이야기]](동영상 12분 37초부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어나자 재한 러시아인들이 재한 우크라이나인들과 함께 주한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반전 시위를 진행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2&oid=055&aid=0000956841|#]][[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4&oid=308&aid=0000030585|#2]] [[2022년 러시아 동원령]]으로 인해 징집 대상인 러시아 남자들이 대대적으로 외국으로 도주하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국경에서 걸려 징집되기도 했다. 전쟁 전부터 한국에 체류하고 있었던 러시아인 일부는 고향의 이웃들과 소식을 나누면서 은근히(...) 안도하기도 한다는 모양.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